이순신 vs 욱일기…개막도 전에 한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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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스포츠]
입력 2021.07.19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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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관련 문구가 논란이 되자 대한체육회는 새 현수막을 선수촌에 내걸었다. 장진영 기자올림픽 개막식을 닷새 앞둔 18일 일본 도쿄의 체감온도는 섭씨 38도까지 올라갔다.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던 도쿄 하루미 지역 올림픽 선수촌 인근 도로에서 일본 극우단체인 국수청년대(国粹靑年隊)가 기습적으로 시위를 시작했다. 이들은 갑자기 차에서 내려 촬영 중인 기자에게 달려들기도 했다. 가슴 철렁한 순간이었다.
극우단체의 차량에는 일본 국기와 함께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욱일기가 붙어있었다. 경계 중이던 경찰과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 관계자들도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우왕좌왕했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기자에게 조직위 관계자는 “올림픽 개최를 반대하는 정치적인 시위다. 혐한 단체는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극우단체가 확성기를 통해 내뱉는 말에는 한국인을 비하하는 내용도 있었다.
일본 극우단체가 도쿄올림픽 선수촌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 중 한명이 빠가야로를 외치며 한국 기자에게 달려들었다. 장진영 기자
올림픽 개막 전부터 한국과 일본이 충돌하고 있다. 지난 14일 한국 선수촌 테라스에 ‘신에게는 아직 5천만 국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남아 있사옵니다’라고 쓴 현수막이 걸렸다. 임진왜란에서 왜군을 격파한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 ‘상유십이 순신불사’(尙有十二 舜臣不死·제게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있고, 전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에서 따온 내용이다.
일본 매체 도쿄스포츠가 15일 “이순신은 반일 영웅으로 한국에서 신격화되고 있다”며 이 플래카드를 문제 삼았다. 하시모토 세이코 도쿄올림픽조직위원장은 이를 두고 “정치적인 메시지를 삼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17일 ‘정치적 선전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올림픽헌장 50조 위반을 들어 철거를 요청했다.
대한체육회는 ‘경기장 내 욱일기 사용에도 똑같이 적용하겠다’는 IOC 약속을 받고 현수막을 내렸다. 그리고 ‘범 내려온다’라는 문구와 한반도 모양의 호랑이가 담긴 현수막을 대신 내걸었다. 그러나 18일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는 “욱일기는 정치적인 주장을 담고 있지 않다. 경기장 반입 금지 물품에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17일 대한체육회가 IOC의 압력 탓에 도쿄올림픽 선수촌 아파트 한국 선수단 거주층에 내건 '이순신 장군' 현수막을 뗐다. 왼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지난 15일 숙소동에 걸린 현수막, 지난 16일 현수막 문구 문제 삼으며 욱일기 시위하는 일본 극우단체 관계자, 이날 현수막 철거하는 대한체육회 관계자 모습. [연합뉴스]
이순신과 욱일기의 대결을 두고 국내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다. 10년 넘게 욱일기 퇴치와 독도 수호 운동을 벌인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일본이 정치적으로 해석하니 (응원 문구가) 정치적으로 보이는 거다. 올림픽 정신이 무엇인지 되묻고 싶다. 그런 (일본과 IOC의) 논리라면 독도 표기나 욱일기 응원도 막았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서 교수는 지난 5월 도쿄올림픽 홈페이지에서 시마네현 위에 작은 점을 찍어 독도가 일본 땅인 것처럼 표시한 걸 발견한 바 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때 IOC는 한반도기에 독도 표시 삭제를 권고한 바 있다. 그런데 일본 홈페이지 지도에 대해 항의하자 IOC는 “정치적 의도가 없다는 확인을 받았다”며 일본 편을 들었다.
올림픽 최상위등급 공식후원사 TOP(The Olympic Partner) 13개 중 일본이 3개(도요타·파나소닉·브리지스톤), 한국은 1개(삼성전자)다. 서 교수는 “일본이 훗날 ‘평창 올림픽 때 너희 땅이 아니라서 뺀 거 아니냐. 우린 도쿄올림픽 때 기록으로 남겨뒀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아울러 서 교수는 “대한체육회가 IOC로부터 욱일기 관련 약속을 받아낸 건 잘한 것이다. 일본은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이 없다. 어떻게 다른 나라를 침공할 때 사용했던 제국주의 군기를 꺼내나. 2019년 일본에서 열린 럭비 월드컵 경기장에서도 욱일기 응원이 있었다. 이번 기회에 ‘욱일기=전범기’라는 걸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위하는 극우세력. 장진영 기자
한편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선수들이 정치적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는 시각도 있다. 체육철학자 김정효 서울대 외래교수는 “아베 신조 정권이 추진한 도쿄올림픽은 ‘동일본대지진으로부터의 부흥’이라는 정치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걸 제외하면 (코로나19 시국에) 올림픽을 강행할 명분이 없다”며 “일본 정부와 조직위는 대회 자체보다 올림픽이 주는 정치적인 이익에 관심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선수촌 플래카드 사건을 확대하는 건 일본의 전략에 말려든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어 “우리 선수들이 냉정해야 한다. 일본 전략에 말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상대의 반칙을 우리도 반칙으로 응수할 이유가 없다. 욱일기나 독도 표기 문제는 선수들이 아니라 대한체육회가 해결할 문제다. 정치는 그대로 두고 오로지 대회에 집중하는 게 일본을 넘어서는 일”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