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훈의 1991~2021 _07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사상 첫 북-일 정상회담을 하고 ‘조일 평양선언’을 채택한 직후 ‘2차 북핵위기’가 터졌다. ‘북-일 접근→북핵위기 발발’의 패턴이 10여년의 간격을 두고 두 차례나 반복된 것이다. ‘우연’일까? 1990~91년, 2002년 두 차례에 걸친 관계정상화 노력이 무산된 뒤 북-일 관계는 출로를 찾지 못한 채 수렁에서 헤매고 있다. 미국은 이 상황이 슬프지 않을 것이다. 2002년 9월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사상 첫 양자 정상회담에서 ‘조일 평양선언’에 서명한 뒤 악수를 하고 있다. 북-일은 1991~92년, 2002~2004년 적대관계 청산과 관계정상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모두 미국의 견제 탓에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평양/일본사진공동취재단 1988년 7월7일 일본 정부는 “일조(일·북) 간에 존재하는 현안의 모든 측면에 대해 북조선과 협상할 용의가 있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이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킬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북한이 미국·일본 등 우리 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직후다. 노태우 대통령이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특별선언)으로 나라 안팎에서 북한과 공존·협력하겠다는 의지를 공식 발표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북을 향해 ‘관계정상화 협상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셈이다. 미국 정부가 노 대통령의 ‘7·7선언’ 석달여 뒤인 1988년 10월30일에야 북-미 외교관 사이의 ‘중립적 장소에서 실질적 대화’를 허용하는 “신중한 방안”(modest initiative)이라는 새 대북정책을 내놓은 사실에 비춰, 일본 정부의 반응은 전광석화와 같았다. 1971년 7월 헨리 키신저 당시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하자 이를 냉전 질서의 중대 변화 징후로 여겨 미국보다 7년이나 이른 1972년 9월 중국과 수교한 일본의 탁월한 ‘외교적 후각’이 다시 작동한 셈이다. 일본 정부는 성명 발표만으론 부족하다고 판단했는지, 이듬해인 1989년 3월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가 식민지배와 관련해 북한에 “깊은 반성과 유감의 뜻”을 밝혔다. 북-일 관계는 1980년대 말까지 적대적 긴장에 가까운 냉랭한 관계였다. 하지만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연쇄 체제 전환, 베를린 장벽 붕괴, 한-소의 급격한 접근 등이 북-일의 상호 접근 필요성을 높였다. 특히 한-소 접근이 결정적 자극제였다. 북은 한-소 수교에 따른 동북아 냉전 질서의 균열, 남쪽으로 크게 기운 힘의 균형추를 일본과 관계정상화로 되돌려야 할 절체절명의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일본도 소련의 ‘남하’에 맞설 ‘북진’이 절실했다. 북-일은 가까워져야 할 이유가 많았다. ‘차이’를 따지기보다 ‘같음’을 만들어가야 했다. 1990년 9월24일 자민당 대표단(단장 가네마루 신 전 부총재)과 일본사회당 대표단(단장 다나베 마코토 전 위원장)이 조선노동당의 초청으로 평양에 갔다. 일본 집권당과 제1야당의 실력자가 이끄는 연합 대표단이 총리의 친서를 들고 평양을 찾았으니, 결과가 좋지 않을 까닭이 없다. 이틀 뒤인 9월26일 김일성 주석과 가네마루, 다나베의 3자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일본 대표단은 가이후 도시키 총리의 친서를 전하며 “우리는 과거의 역사에 대한 속죄와 보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밝혔고, 김 주석은 북-일 국교 교섭 개시 제안으로 화답했다(와다 하루키, , 218~219쪽). 다시 이틀 뒤인 9월28일 ‘조일관계에 관한 조선노동당, 일본의 자유민주당, 일본사회당의 공동선언’(3당 공동선언)이 발표됐다. 모두 8개항으로 이뤄진 이 역사적인 3당 공동선언은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국교 관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인정”(2항)하고, “정부 간의 교섭을 1990년 11월 중에 시작하도록 강력히 권고하기로 합의”(7항)했다. 아울러 36년간의 식민지 시기뿐 아니라 “전후 45년간 조선인민에게 입힌 손실에 대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충분히 보상해야 한다고 인정”(1항)했다. 관계정상화 협상 개시 방침도 놀라운데, 일본이 전후 45년에 대해서도 보상의 필요성을 인정한 사실은 충격에 가까운 파격이다. 일본 쪽의 북-일 관계정상화 의지가 읽히는 대목이다. 북-일은 ‘3당 공동선언’의 합의 내용을 현실화하려 발 빠르게 움직였다. 1990년 11~12월 중국 베이징에서의 세 차례(11월3~4일, 17일, 12월15~17일) 예비회담을 거쳐 1991년 1월30~31일 평양에서 ‘조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정부 간 제1차 본회담’을 열었다. 북-일의 미래 청사진으로 불릴 법한 ‘3당 공동선언’ 합의·발표는 한-소가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수교 합의 사실을 발표(1990년 9월30일)하기 이틀 전 이뤄졌다. ‘3당 공동선언’은 한-소 접근의 파장을 흡수하려는 북-일의 전략적 대응이다. 탈냉전기 유일무이한 패권국의 입지를 다지려 한 미국은 아시아 최고 동맹국 일본의 대북 접근을 반기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3당 공동선언’ 직후 일본 견제를 노골화했다. 미국이 일본을 압박해 “북이 핵사찰을 받아들이게 하고, 전후 45년의 보상은 거부하며, 식민지 36년간의 보상이 북한 군사력 강화에 이용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고, 남북대화가 후퇴하지 않도록 배려하라고 요구했다”는 보도(1990년 10월5일)는 ‘징후적’이다. 대체로 그러했듯이, 일본은 미국에 맞서지 않았다. 평양 1차 본회담에서 미국이 요구한 4개항을 ‘회담에 임하는 기본 방침’이라고 북에 밝혔다. 북은 평소와 달리 반발하지 않았다. ‘결과’를 만들어내려 무진 애를 썼다. 일본의 “20명의 일본인 처들의 조속한 고향 방문 실현과 12명의 일본인 처들에 대한 안부 조사” 요청에도 “가능한 범위에서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 화답했다. 그러나 미국의 압박에 밀린 일본의 회담 기조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경해졌다. 3차 본회담(1991년 5월20~22일, 베이징)에서 일본은 핵안전조치협정 체결(국제원자력기구의 핵사찰 수용),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 남북대화의 의미 있는 진전 등 3개항을 ‘국교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다. 북으로선 유엔 가입과 남북대화는 스스로 해소할 수 있었지만 ‘핵문제’가 문제였다. 북은 “이 문제의 해결에 협력할 수 있는 길은 조미 간에 협상이 이뤄지도록 하는 길밖에 없다. 일본 측이 조미 간에 협상이 이뤄지도록 미국 정부에 해당한 권고를 해줄 것을 다시 한번 부탁”했지만, 일본은 거절했다고 이 보도했다(1991년 5월21일 3~4면). 설상가상으로 일본은 3차 본회담에서 “리은혜 문제 조사”를 북에 요구했다. ‘이은혜 문제’란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범인으로 잡힌 김현희가 자신의 일본어 교육 담당이 ‘납북 일본인 이은혜’라고 진술한 데 근거를 두고 있다. 북은 “모략극”이라면서도, 4차 본회담(1991년 8월30일~9월2일, 베이징)에서 “본회담과는 별도로 회담장 밖에서 두 나라 외교부 부국장급 비공식 접촉”을 하기로 일본과 합의했다. 북의 관계정상화 의지가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그러나 북-일 수교 교섭 협상은 ‘핵문제’(와 ‘이은혜 문제’)에 막혀, 8차 본회담(1992년 11월6일, 베이징)을 끝으로 성과 없이 일단락됐다. 은 “화해와 우호적인 분위기”(1차 본회담), “우호적인 분위기”(2차 본회담) 속에 1·2차 본회담이 진행됐다고 보도했으나, 3~8차 본회담 보도문엔 “화해”나 “우호”라는 단어를 단 한 차례도 쓰지 않았다. “미야자와 정권의 등장 이후 일본의 (핵문제에 대한) 태도가 우리의 견해에 근접해오고 있다. 일본의 (대북) 조건은 핵문제에 따라 현저하게 강경해지고 있다. 일본의 일부 관료는 이런 방침을 약화시키려 하겠지만, 우리는 일본 정부의 이런 방침을 반드시 유지시켜야 한다”던 제임스 베이커 당시 미 국무장관의 전략(1991년 11월18일 딕 체니 국방장관한테 보낸 비밀전문)이 성공한 셈이다. 미국은 이른바 ‘북한 핵문제’(1차 북핵위기)를 빌미로 일본의 대북 접근을 가로막은 것이다. 투키디데스와 카를 마르크스였던가.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 이가. 2002년 9월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사상 첫 북-일 정상회담을 하고 ‘조일 평양선언’을 채택한 직후 ‘2차 북핵위기’가 터졌다. ‘북-일 접근→북핵위기 발발’의 패턴이 10여년의 간격을 두고 두 차례나 반복된 것이다. ‘우연’일까? “(1990년 9월) 가네마루 (방북) 때는 베이커가 핵문제를 꺼냈다. 결국 미국의 말이 옳았음을 나중에 알게 되긴 했지만, 그렇다면 왜 좀 더 일찍 정보를 주지 않았던 것일까. 우리가 움직이면 미국은 반드시 제지하려 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고이즈미의 방북과 북-일 정상회담을 실무적으로 준비한 일본 외무성의 후지이 아라타 북동아 과장이 후나바시 요이치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126쪽). 말을 모나게 하지 않으려 애쓰는 일본 문화를 고려할 때, 이 증언은 이례적일 정도로 강한 불만의 정조를 품고 있다. 1990~91년, 2002년 두 차례에 걸친 관계정상화 노력이 무산된 뒤 북-일 관계는 출로를 찾지 못한 채 수렁에서 헤매고 있다. 미국은 이 상황이 슬프지 않을 것이다. 이제훈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여섯 차례의 북한 핵시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 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 nom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