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이 차별인 줄도 모르고 살았다" 정기후원 [차별의 평범성 드러내기] ⑨ 박명애 대구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조성은 기자 | 기사입력 2021.07.20. 08:17:43 최종수정 2021.07.20. 08:29:31 URL복사 차별금지법(평등법)은 여성만을 위한 법도, 성소수자만을 위한 법도, 장애인만을 위한 법도, 인종적 차별을 겪는 자들만을 위한 법도 아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법이다. 사회 각계 각층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시민들이 참여한 '평등의 에코-100(echo-100)' 캠페인의 취지가 그것이다. 디지털 성범죄부터 누구에게나 똑같이 다가오는 죽음, 밥벌이 때문에 견디는 직장갑질, 저 멀리 북극곰의 문제, 미친 부동산 가격 문제 등등. 이것들은 이제 평등에 관한 문제와 연결돼 있다. 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지지하는 100명의 선언 '평등의 에코-100(echo-100)'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각자가 고민한 차별에 대해 물었다. 은 '평등의 에코-100(echo-100)'에 참여한 시민들을 릴레이로 인터뷰 해 싣는다.편집자 [차별의 평범성 드러내기] ② "죽음 마저도 차별당하는 사람들…장례의 차별을 없애야 한다" (☞바로가기) ③ "'저렴한 목숨'은 죽어도 되나…산재와 차별은 같은 뿌리" (☞바로가기) ④ 기후위기 최대 피해자들에 "학교는 어쩌고 왔니"라 묻기 전에 (☞바로가기) ⑤ "대한민국의 부동산 경제, 청년들 등에 빨대를 꽂고 있다" (☞바로가기) ⑥ "'지잡대 나오니 그렇지'?...직장 모욕과 갑질은 차별의 다른 이름" (☞바로가기) ⑦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사업'이 아직도...'매매혼'이 차별을 생산한다" (☞바로가기) ⑧ "동물 차별, 사람 차별과 정말 상관 없을까요?" (☞바로가기) ▲박명애 대구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연합뉴스 차별이 심할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장애인은 그런 존재다. 출퇴근 길, '기본교육 과정'이라는 학교도. 박명애 대구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는 47세 장애인 야학에 가기 전까지 집에만 있는 게 당연하고 학교에 못가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고 했다. 못하고 못가는 게 너무 당연해서 차별인 줄도 몰랐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투쟁의 현장에서 앞자리에 나서 싸우는 박 대표. "내가 살아온 지난 세월이 한이 찬다"며 "살아서 세상을 바꿔놓을 거다. 다른 사람은 이렇게 안 살게 해야겠다"고 말한다. 박 대표는 "이 세상에는 '장애인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벽이 쳐져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장애인만 그런 게 아니고, 옛날에 양반 상놈 갈라놓은 것처럼 그대로 그렇게만 살게 한다. 비정규직이면 돈 적게 받아야 하고 위험한 일 해야하고, 그렇게 살게 만들어 놨다. 힘든 사람은 암말 못하고 힘들게만 살게." 프레시안 : 개별적인 차별금지법인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나. 박명애 :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장애인은 장차법이 있다지만 비장애인으로서 차별을 받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있다. 장차법이 2008년 시행됐는데, 아직 그 법이 그렇게 큰 힘을 발휘하고 그러는 건 아니지만 한해 두해 가면서 달라지는 것들이 있다. 차별금지법도 생기면 서로가 조심할 것이고 서로 존중하는 문화가 되지 않겠나 생각한다. 그리고 장차법만으로 미흡한 부분도 있다. 차별이 한가지 이유만으로 한 번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알게 모르게 겪는 차별들이 있다. 차별인 줄도 모르고 산다. 학교 가기가 힘들어서 못 다니고 또 비정규직으로만 고용해서 그렇게 다니다가 해고당하면 비정규직 차별이 된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대표로 있는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이돈명 인권상을 탔다. 지난해 대구 지역에 코로나19가 확산됐을 때 큰 활동을 했다고 들었다. 박명애 : 그때 대구는 완전 난리였다. 갇힌 섬에 있는 것 같았다. 대구 시내가 텅 비고 유령도시 같았다. 혼자있고 완전히 고립돼서 막연한 두려움만 커져가고 있었다. 그럴 때 전국에서 대구가 힘들다고 마스크나 소독약, 이런 걸 많이 보내주셨다. 코로나 사태 처음에 장애인들은 마스크 그런 것도 사기 되게 힘들었다. 길에 줄 서도 못살 때인데 나는 나가지도 못했다. 그때도 상근자들이 조를 짜서 집집마다 마스크와 소독용품을 배달했다. 혼자 너무 두려웠는데 그런 손길들이 옆에 있어 참 고마웠다. 장차연 상근자 국장 비롯해서 전체 직원들, 회원들이 일요일도 없이 너무 고생 많았다. 상근자가 서른 몇 명 된다. 다른 일은 다 손놓고 여기에 매달렸다. 한 명이 천몇백 가구를 돌았다고 했다. 프레시안 : 나가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했을 것 같다. 박명애 : 나는 나가지도 못하고. 사무실에 다른 사람들은 나가서 일하고 있는데, 나가서 힘을 보태야 하는데. 일 많이 돕지도 못하면서 돕는다고 나갔다가 안 그래도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또 일을 더 보태줄까 봐 나가지도 못했다. 그리했던 그때 정말 우리가 세상 같이 사는구나, 그래야 하는구나. 정말 아무 희망도 없는 거 같았는데 코로나도 이겨낼 수 있겠다 싶은 마음의 용기가 생겼다. 프레시안 : 그런 건 당연히 정부에서 할 거라고 생각했다. 장애인 대책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박명애 : 그때는 시청이나 이런 데서도 아무 대책이 없었다. 손이 모자라서 그렇겠지만. 그때 탈시설한 한 분이 확진자가 됐다. 그분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장차연 상근 직원들이 직접 방호복을 입고 들어가서 그분을 살폈다. 그 뒷날인가, 상주의 병원에 자리가 돼서 직원들이 대구에서 상주까지 그분을 보내드렸다. 그분은 나중에 퇴원하시고 장애인 공동체에서 직접 확진자를 도왔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활동보조 서비스 이런 게 있지 않나. 박명애 : 활동보조 서비스가 있다. 하루 몇 시간 이런 식으로 활동보조인이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을 도와준다. 활동보조 서비스가 없어지거나 한 건 아니지만 그분들이 확진자 간호하고 그럴 순 없으니까. 활동보조 서비스를 계속 받아도 무서운 병이 도니까. 활동보조 분들이나 받는 입장에서 다 걱정되지 않겠나. 서로 불안함 속에서 하루하루 지냈다. 휠체어 타는 장애인은 확진자가 되면 병원을 가더라도 옆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 병원이 사람 밀려오고 엄청 바쁜데 나를 다 케어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나는 활동보조와 같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을까. 프레시안 : 장애인 콜택시가 비장애인 확진자 이송에 투입되기도 했는데, 장애인 확진자는 어떻게 했나. 콜택시 몇 대 없는 것마저 없어져서 더 힘들었을 것 같다. 박명애 : 장애인 대책은 뭐 없었다. 그럴 때 너무 대책이 없다. 우왕좌왕하는데 실망스러울 때가 많다. 몇 년 전에 메르스 때도 걱정을 많이 했었다. 그때도 별다른 대책이 없이 넘어갔다. 그때 대책이 있었으면 이번 코로나에 그렇게 공백은 없었을 텐데. 걱정이다 앞으로 그런 일이 닥치면 또 어떻게 되는 건지. 프레시안 : 백신 맞을 때는 어땠나. 요양병원에 계신 분들이나 기저질환자는 먼저 맞았다. 박명애 : 저는 나이 순서대로 오는 걸 맞았지 장애인이라고 먼저 맞거나 하지 않았다. 기저질환자나 요양병원은 먼저 맞아야 한다고 했는데 장애인은 그런 대책에 포함되지 못했다. 장애인 기저질환자 많다. 저도 그렇고. 몸이 약하다 보니까 저는 당뇨, 혈압 이런 거 있고 기관지가 많이 약한 편이다. 폐에 병이 있는 그런 건 아닌데 기침이 잦고 매년 가을마다 독감주사 맞는다. 코로나는 갑자기 생겨서 그런가 그런 게 없었다. 특혜를 달라는 게 아니고 그럴 때 기준을 잘 모르겠다. 프레시안 : 활동보조가 있어야 하고 또 일대일로 있다. 병원은 백신 맞고 더 감염 없다고 했는데 좀 뭔가 싶다. 마치 장애인은 없는 사람인 것 같다. 박명애 : 작년에 청도 대남병원에서 코로나로 많이 돌아가셨다. 시설에 갇혀있던 분들이다. 코로나 백신 요양병원 이런 데 먼저 집중적으로 맞은 게 아마 시설 집단감염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갇혀서 살면 아무래도 취약하다. 시설 밖 식당 같은 곳에선 4명 이상 식사도 못 하게 하면서 그분들은 한곳에서 뭉쳐있게 한다. 밖에서는 거리두기도 하고 그러는데 시설 안에서는 그런 조치를 전혀 할 수가 없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탈시설이야기로 넘어가야겠다. 탈시설, 시설 밖에서 살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운동이다. 장애계에서 매우 중요한 이슈다. 작년 보궐선거에서는 서울에선 '탈시설장애인당'이라는 가짜정당도 있었다. 박명애 : 서울에서 여러가지 재밌는 운동을 많이 한다. 우리 박경석 대표님. (웃음) 탈시설 오래전부터 이야기해왔다. 매번 진전은 안 된다. 알겠다, 하겠다 하면서도 예산이 없다고 한다. 근데 시설에는 돈 안 들어가나. 시설에 돈 어마어마하게 들어간다. 가둬놓을 돈은 있는데 나와 살게 할 돈은 없다는 게 이상하다. 우리나라는 예전에 6·25, 88올림픽, 그럴 때 장애인들이나 갈 곳 없는 사람들을 시설에 많이 가뒀다. 그런데 탈시설은 세계적인 추세다. 유엔에서도 한국에 탈시설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아직도 예산이 안된다고 한다. "밖에 있는 것보다 안에 있는 게 안전하다"는 이런 이야기도 한다. 그런데 그게 누굴 위한 안전인지 모르겠다. 장애인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고 그게 편하고 안전하다고 하는데. 시설에 있는 분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프레시안 :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말도 한다. 그냥 막연하게, '시설'이라면 왠지 다 갖춰진 곳이라 편리할 것 같다. 시설보다 수용소에 가까운 것 같다. 사람이 숨 쉬고 있다고 사는 게 아니지 않나. 박명애 : 시설 가보면 눈에 보인다. 안 편하다. 병실 같은 곳에 열 명씩 있고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만 있다. 저녁에 잠 안 자면 약 먹여서 재우고. 나이 어린 분들도 세상 의욕이 없다. 생기가 없는 눈을 보면 마음이 언제나 너무 아프다. 탈시설한, 시설에서 나오신 분들은 몇 개월만 지나면 표정이 달라진다. 그런데 지난 세월 동안 꿈도 못 꾸고 살았던 분들이 꿈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뭘 하고 싶다거나 어떻게 해야겠다는 욕심도 안 생긴다. 그게 많이 슬프다. 나이라도 좀 어리면 모르겠는데. 너무 늦게 나온 분들, 내가 67인데 내 나이 비슷한 나이에 나온 분들이 많다. 그분들은 어떡하나. 그냥 담배나 피우고 하루를 무의미하게 지내고 그러는 분들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안 좋다. 어떻게 해야 그분들이 자기 삶을 살 수 있을지 그게 큰 고민이다. ⓒ연합뉴스 박명애 : 저도 이렇게 장애가 심해도 밖에서 잘 산다. 그분들이라고 밖에서 못살 이유가 없다. 혼자 있으니까 너무 좋다. 지금 독거장애인이다. (웃음) 육십몇에 처음으로 혼자됐다. 어릴 때부터 내내 이렇다 보니까 우리 엄마가 꼼짝도 못 하고 내 옆에만 있었다. 동생들도 그렇고. 어떻게 결혼을 해서 애가 둘인데, 애들 결혼해서 다 나가고 육십다섯살에서야 혼자됐다. 한 이삼년 전에. 활동보조 분이 10시 되면 가신다. 가시고 나면 혼자 있으니까. 할 게 좀 있으면 밤에 늦게 자고 아침에 좀 일어나기 힘들면 늦게 일어나고. 내 마음대로 이것저것 한다. 혼자서 살살 화장실도 갔다가. 내 혼자 있는 우리집이니까 내한테 맞춰놓은 화장실이다. 그런 식으로 모든 게 내가 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런 게 있다. 누가 같이 있으면 날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도 나한테는 간섭으로 들리고 눈치 보이고 그런 것들이 많이 있다. 프레시안 : 신경쓰일 것 같다. 챙겨주는 사람 있으면 좋지만 또 독립하고 싶고 그런 게 사람 심리다. 박명애 : 저 아니고 다른 분들도 만나보면, 시설에 계신 분도 그렇지만 집에 계신 분들도 눈치 보고 그렇게 된다. 내가 아무것도 못 하니까. 내가 철이 들어가니까 엄마 힘드신 거나 동생들 그런 거나 다 눈에 보이니까 암말도 안 해야하고 그랬던 게 완전히 습관이 돼 버린 것 같다. 혼자 있으면 내가 혼자 조용히 좀 생각도 하고 하는데. 생각해봐야 내일 아침되면 성질대로, 급하면 급한대로 움직이겠지만. (웃음) 혼자 있는 게 별거 없어도 되게 편안하고 좋다. 프레시안 :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게 처음인가. 박명애 : 처음이다. 내가 이렇다고 우리 어머니는 저를 혼자 둘 수 없어서 어디 친구들하고 모임도 만든 적 없이 평생을 사시다 가셨다. 그렇게 어머니 죄업으로. 어머니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장애를 가지게 했나보다" 이 소리를 했었는데. 내가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그게 우리 엄마의 죄도 아니고 내 죄도 아니란 걸 알았다. 거리라도 내가 혼자 다닐 수 있게 돼 있었으면. 장애가 있어도 손가락질 안 받고 살았을 텐데. 나라 전체가 다 그랬다. 내가 일곱 살에, 학교 들어갈 나이가 됐을 때 학교를 못갔다. 엄마가 내 학교 못 보내서 그걸 미안해했다. 엄마는 나한테 미안해 해야하고. 나는 내가 당연히 학교도 안 가고 집에만 있어야 하는 줄 알고 살았다. 지난 세월들이 다. 장애인들을 가둬놓지 않으면 무방비 상태로 '너희가 알아서 책임져라' 한다. 가족들한테. 형제들, 부모님, 그 책임으로만 남겨놨다. 장애가족 돌보다가 일 해야하면 시설에 보내고. 그런 식이다. 프레시안 : 활동보조 서비스가 많은 걸 바꾼 것 같다. 박명애 : 활동보조 없었으면 지금 같은 코로나에는 더 어떻게 됐을까 싶다. 장애계에서 활동보조 도입하자고 삭발하고 단식하고 엄청 투쟁했다. 나는 그전까지 활동보조 같은 게 있는 줄 몰랐다. 그때 이미 세계적으로 활동보조가 보편화 된 제도였다. 일본에서도 그때 이미 30년 전에 생겼다 하고. 내가 한 30년 전에 활동보조 쓸 수 있었으면 내 인생이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도 하고 경제력도 가지고. 세상 살아갈 용기도 그렇고. 그 세월이 지나버렸다. 난 내 지난 시간이 너무 아깝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마흔일곱살에 야학을 시작했다. 아까 꿈 얘기가 있었는데, 야학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하고 생긴 꿈이 있나. 박명애 : 꿈이라기 보단 처음에는 집에만 있었으니까 학교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냥 막연하게 내가 책을 좋아하니까, '아, 내가 건강한 아가씨로 컸으면 국문학을 공부해봤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다. 마흔일곱에 질라라비 장애인 야간학교에 들어갔다. 가서 보니까 학생들이 다 장애인들인데, 나는 그래도 이렇게 말도, 잘 하는 말은 아니지만, 말이라도 할 수 있지 않나. 학교에는 말이 힘든 분도 있고 손이 힘든 분도 있고. 장애인과 어울려 지내면서 내 불편함은 내보다 나은 사람이 도와주고, 내가 또 그분보다 더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내가 돕고. 학교 가서 내가 누굴 도울 수 있구나, 나는 이걸 할 수 있구나, 이런 걸 느꼈다. 장애인하고 이렇게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학교 가서 제일 좋은 게 그런 거였다. 학교를 다니고 나서는, 공부를 하면서 '이동권'을 알게 됐다. 내 꿈이라면 그거다. 내가 나중에 집에 들어가도 옛날처럼 밖에도 못 나오고 사는 게 아니고, 나오고 싶을 때 나오고 사람도 만나는 거. 그렇게 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다 만들어놓고 학교를 졸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투쟁해야 하는 줄은 몰랐다. (웃음) 프레시안 : 야학 다니기 전까지는 어떻게 지냈나. 박명애 : 집에만 있었지 뭐. 내가 방 안에서만 살아갈 때, 나는 하고 싶은 게 생겨도 못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생각도 전혀 안 해야 하는 줄 알았다. 엄마하고 집에 있으면 그게 내 하루의 제일 좋은 날이고. 그것만 이리 생각했지 큰 꿈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뭐라도 좀 해봤으면 밖에 나가고 싶고 누구를 만나도 보고 그랬을 텐데. 저는 전화로 바깥 사람들과 소통했다. TV보다가 전화번호 나오고 그러면, 어디서 누가 꽃 예쁘게 키운다 이런 거 나오면 거기 전화해서 물어보고 그랬다. 사람을 보고 싶었다. 사람이 정말, 내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었는데 할 수 없었다. 야학을 가서야 사람을 만났다. 프레시안 : 저는 학교 그냥 다녀야 해서 다니고 그랬던 것 같다. 지금 보니 학교가 주는 의미가 참 크다. 박명애 : 질라라비 장애인 야학은 대구에서 시민운동 하던 비장애인 활동가분들이 만들었다. 야학이 있으면, 학교 간다고 하면 장애인들이 아무래도 밖에 나오기 쉽겠다 싶어서. 다른 걸로는 못 나오니까. 진짜 그렇다. 어디 놀러가자, 바람 좀 쐬러 가야겠다 그런 거 못한다. 우리 아버지부터 어렸을 때부터 저한테 "누구 등에 업혀서 뭐하러 나가려 하느냐"면서 막았다. 나가봤자 다른 사람한테 피해 준다고. 그런 게 있는 거 같다. 부모님들이, 우리 아버지만 그러신 게 아니고, '이렇게 움직이는 것도 니가 불편한데 다른 사람한테까지 피해 주면서 다니지 마라', 그렇게. '니는 그냥 집에 있으면서 테레비나 봐라', '전화나 받아라' 이리된다. 장애인 자식은 집에만 있어야 하고, 시설이면 시설에 갇혀서 못 나오고 그랬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지금 질라라비 학교의 교장이다. 박명애 : 학교 졸업하고 투쟁도 하고 대표도 하고 그러다 교장도 됐다. 공부를 잘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