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세상의 많은 비극은 오해에서 비롯된다.
1945년 9월 8일 오전 인천에 상륙하는 미 육군과 조선인 사이의 오해에서 시작된 비극은 75년이 지난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반복되고 있다. 75년 전엔 미국과 한국 사이의 오해였다면, 지금은 대한민국 사람들 사이의 오해라는 것이 차이면 차이다. 오해의 당사자는 변했지만 비극의 양과 질에서는 차이가 없다. 점령군을 점령군이라 인식하지 않으려 몸부림치고, 그렇게 부르지 않으려 하는 비극이 반복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왕의 항복선언, 9월 2일 항복문서 서명에 이어 9월 7일에는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태평양 사령관 이름으로 '조선주민에 포고함'이라는 제목의 포고령 제1호를 발표한다. 포고령 제1조는 "항복문서의 조항에 의거해 본관 휘하의 군대는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을 점령함"이라고 명기했다. 같은 날 발표된 포고령 제2호는 "점령군의 보존을 도모하고 점령지역의 공중치안,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점령군의 목적이며 이를 위반하거나 "적대 행위를 하는 자"는 "사형 또는 타 형벌"에 처할 것을 준엄하게 알렸다.
점령군, 점령지
ⓒ NARA/박도
미군 스스로 자신들을 점령군(occuppying force)으로, 자신들이 지배할 곳을 점령지(occupied area)로 불렀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마지막 3년 동안 적이었던 일본의 지배 지역 중 하나인 조선 땅에 들어오는 입장에서는 당연한 인식이었다. 비록 항복은 이뤄졌으나 조선 땅에는 여전히 일본군과 경찰이 존재했고, 일본인 공무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듬해 2월까지 일본인들 중 일부가 미군정을 돕기 위해 남아 있었던 것도, 해방된 나라의 관보가 여전히 패전국 일본어로 발행된 것 또한 미국의 결정이었다.
미 24군은 인천 상륙에 앞서서 어떤 군중집회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렸다. 그들에게 순수 일본인이나 일본의 지배 아래 일본의 신민으로 연합국에 대항했던 조선인들은, 적대국의 일부였다. 비록 조선인들 중 일본에 대항하던 저항단체나 임시정부가 있었지만 그들은 이들의 존재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문제는 조선 사람들의 오해였다. 조선 사람들은 비록 해방 직전 몇 년 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 요청을 지속적으로 거부했던 미국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즉각적인 독립을 지속적으로 반대했던 미국임에도 불구하고, 개항 이후 늘 조선보다는 일본을 중요시하던 미국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을 점령군이 아니라 해방군으로 생각했다. 미군 스스로는 점령군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공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은 이들을 해방군으로 여겼다.
1945년 9월 8일 오전 8시 30분 존 하지 미국 제10군 제24군단이 상륙하는 인천에 환영 인파가 몰려들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었다. 최근 목격한 태극기부대의 모습이었다. 환영 인파 중 일부가 당시 미국의 위탁으로 한반도 남쪽의 치안을 맞고 있던 일본 군경이 설정해 놓은 경계선을 넘었다. 일본 군경의 발포로 2명의 조선인이 사망하고 9명이 총상을 입었다. 해방된 지 23일이 지난 시점에서 조선인들이 일본군의 총탄에 쓰러진 비극이었다.
미군은 일본군의 발포에 대해 어떤 책임을 추궁하지 않은 채 이들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로 진군했고, 이튿날 하지장군은 총독부 건물에 걸려 있던 일장기를 성조기로 바꾸어 다는 동시에 조선반도 남쪽에 대한 미국 군대에 의한 직접통치(군정) 실시를 발표했다.
유식과 무식
ⓒ 권우성
점령군은 스스로를 점령군이라 부르고, 그렇게 행동했지만 우리는 그들을 해방군이라 오해하고 환영했던 75년 전의 비극은 당시에 끝났어야 했다. 그러나 이후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당시에는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이 상호 오해를 했다면 지금은 우리 혼자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은 작지만 의미 있는 차이이기는 하다. 반복되는 현실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반복되는 비극을 막기 위해 몇 가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1945년 종전과 동시에 남쪽과 북쪽에 들어온 미군도 소련군도 '점령군'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이미 조선의 즉각적인 독립보다는 미국과 소련에 의한 일정 기간의 군사적 지배를 합의하고 들어왔다는 측면에서, 스스로를 점령군이라고 솔직하게 부르든, 해방군이라고 미화화든, 점령군이란 본질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명칭이 아니라 본질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들이 점령군이었다는 것은 이후에 이들이 남과 북에서 취한 행동을 보면 명약관화하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자신들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친미, 친소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측면에서 이들 두 나라는 제국주의 국가의 본질에 충실했다. 세상에 더 나은 제국주의, 더 나쁜 제국주의는 없다. 힘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타민족을 지배하는 제국주의는 그냥 제국주의일 뿐 거기에 선한 제국주의와 악한 제국주의의 구분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피식민지 민족의 입장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둘째, 점령 뒤 이들 군대의 성격이 점령군에서 주둔군으로의 전환했다는 것(미국)과 점령군에서 군사자문단(소련)으로 변환했다는 것 사이에도 큰 차이는 없다. 미국은 섣부른 군대 철수로 야기한 한국전쟁을 겪으며 주둔을 장기화해 현재에 이르고 있고, 소련은 미국의 방심을 틈타 시도한 한반도 공산화 시도가 실패한 뒤 중국 등 경쟁국 등장으로 군사적 영향을 유보해 왔다는 정도의 차이뿐이다. 침략을 당한 대한민국은 전시에 대비해 작전권을 포기한 반면, 침략을 감행한 북한은 여전히 전쟁에 대비해 전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셋째, 역사 이야기에서 관점의 차이는 존중받아야 하지만 무식이 존중받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역사에서 사실과 해석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무식과 유식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다. 인정해야 할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유식이라면, 인정해야 할 사실에 눈감은 채 자신의 주장을 반복하는 것은 무식이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즉각적인 독립을 원하던 민족의 의사를 무시하고 한반도를 분할해 남과 북에 들어온 미군과 소련군이 점령군이었던 것은 그들도 인정하는 사실이고, 당시 모든 문서에 표기된 역사적 사실 기록이다. 이렇게 들어온 점령군 미군과 소련군이 이후에 남과 북의 발전과 한반도 평화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평가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해석이다. 역사 해석의 다양성은 최대한 인정돼야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외면한 채 자신의 해석을 강요하는 것은 존경받지 못할 무식일 뿐이다.
안타까운 착각
ⓒ 국회사진취재단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분할 점령을 해방으로 보는 그릇된 시각을 만들어낸 것은 종전 당시 미국과 소련이 이타적 국가라는 착각, 이들이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게 불가피했다는 착각, 이들의 점령이 선의의 결과였다는 남쪽의 친미 정치인들-북쪽의 친소 정치인들이 갖고 있던 착각의 결과였다. 미국과 소련은 이미 2차 세계대전 중에 이뤄진 몇 차례의 회담에서 한반도에 대한 즉각적인 독립을 인정하지 않기로 의견을 모으는 데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국가들이다.
잘 알려진 대로 1943년의 카이로회담에서 선언한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 독립시키겠다는 약속 자체가 즉각적인 독립의 불가함을 선언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가능한 한 빠른 시일에" 혹은 "즉시" 독립을 시킨다는 착한 뜻으로 오해한 것이 당시 한국의 정치인들이었다. 좌와 우의 구분이 없었다. 사실에 기반한 자기 확신이 아니라 희망에 매달린 확증편향이었다.
미국과 소련에 의한 남과 북 분할 점령 의지를 명확하게 선언했던 1945년 2월 얄타회담 이전에도 분할 점령은 이미 정해진 방향이었다. 전쟁 중에 전후 패전국 지배 영토에 대한 통치 방향을 준비하기 위해 미국에서 만든 다양한 비밀 정책 보고서들에는 분할 점령의 의도가 이미 명료히 드러나 있었다. 그 한 예가 미국의 대외관계심의위(Council on Foreign Relations)가 수행한 한국 정책보고서 'The Problem of Constituting an Independent Political Regime in Korea(한국의 독립 정치 체제 구축 문제)'이다.
1944년 5월 22일 자로 발표한 이 보고서는 미국 등 연합국이 종전 1년 3개월 전인 당시 일본의 조기 항복 가능성을 인지하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보고서에는 명확하게 "한국에 어떤 형태의 독립정부도 세워져서는 안 되며, 한반도는 전후 일본 관리의 목적을 위해 군사지대화시켜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점령군의 구성에 관해서 이 보고서는 한 나라의 단독 점령은 연합국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 때문에 불가능하고, 연합국 군대의 공동 지배는 연합국 간의 협조체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려움이 예상되고, 가장 현실적이고 바람직한 것은 두 나라에 의한 분할 점령이라는 것과 소련과의 분할 점령이 미국의 국익이나 조선인들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는 정책 방안을 제시했다.
미국은 이미 점령을 준비 중이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수년간 자료를 찾아 연구했던 필자 경험에 의하면, 이 보고서 이외에도 미국은 종전 훨씬 이전부터 점령 예정지역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한국도 당연히 대상 지역 중 하나였다. 대표적 문서로써 카이로회담 전인 1943년 6월 전쟁성 일반참모부 군정보처에서 'Survey of Korea'라는 한국 통치 준비자료를 만들었고, 종전 직전인 1945년 4월에는 한국에 관한 육군과 해군 공동종합보고서 '한반도의 군사적, 전술적 자료를 담은 정보조사서(JANIS 75)'를 완성해 점령 준비를 체계적으로 한 바 있었다.
당시 한국에 들어온 미군 장교와 군정 관계자들은 이들 문서로 군정 훈련을 받은 후에 입국을 했다. 이들 문서에서는 공통적으로 한국인들의 교육 수준이 높고, 사회 현실은 안정적이어서 충분히 자치능력이 있다는 점과 이들이 자치와 독립을 간절히 원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의 통치자들이나 외교전문가 집단은 즉각적인 자치나 독립의 부여는 미국의 이익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36년간 제국주의 지배로 신음한 한국인들의 기대나 희망보다는 자국 이익을 위해 군사적 점령을 선택한 미국, 그 이익을 힘으로 관철하려 들어온 미군이 점령군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군정은 점령군이 펴는 통치 형태이지 해방군이 주는 시혜의 결과일 수는 없다. 두 번째 한국 주재 미군정 장관이던 러치가 당시 한국 언론인들과 한 기자회견에서, 민주적 의사결정을 요구하는 한국 기자에게 "세상에 민주적인 군정은 없다"고 대답한 것은 곱씹어볼 만하다.
군정에 민주주의를 기대하던 군정 당시의 한국 기자와, 점령군을 '해방군'이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현 정치인들이 다르지 않다. 역사적 사실을 모르거나, 혹은 알고도 외면하고 싶은 심리가 동일한 것이다.
제대로 모르거나, 알고도 외면하고 싶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