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크기 작게보기 1. 폭우 속을 뚫고 온 흔적이 역력했다. 머리카락엔 빗방울이 맺혀 있고 셔츠는 가슴팍까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우비를 입고 당산역에서 국회 본관까지 따릉이를 타고 오는데 우비가 찢어졌다고 했다. 젖은 머리도 닦고 얼굴도 손보고 한숨 돌리고 이야기를 시작해도 된다고 했는데 티슈 몇 장으로 빗물을 닦아내곤 자리를 잡았다. 예상했던 대로 요란한 너스레 같은 것은 없었다. 인터뷰를 요청하면서 심야도 좋고 휴일도 좋으니 최대한 인터뷰 시간을 넉넉하게 갖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주중에는 이 사람에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잡은 시간이 일요일 오전 10시였다. 대화는 짧은 질문에 이 사람의 답이 길게 이어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숨을 고르고 생각을 다듬어 대답하는 경우가 없었다. 말 그대로 즉문즉답이었다.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겠지만 몸에 밴 습관처럼 보이기도 했다. 말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도 실용적이지만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도 실용적이었다. 상대방의 눈길을 놓치지 않고 말했는데 그 눈빛에 감정이 담기지는 않았다. 좋게 말하면 쿨했고 달리 말하면 건조한 느낌이었다. 그런 점에서 천안함 장병을 만났을 때 이 사람이 보여준 눈물은 예외적인 것이다. 2. 윤석열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꽤 길게 이어졌다. 제1야당 대표인 이 사람에게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풍부한 여의도 정치 경험을 바탕으로 제3지대 불가론과 조기 입당을 강조하는 논리는 설득력이 있었다. " 윤 총장이 지금 제 앞에 계시다면 '돈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어볼 거 같습니다. 윤 총장 주변에서는 펀드를 만들자고 할 거예요. 언뜻 들으면 맞는 이야기예요. 펀드를 통해서 선거자금을 모으고 나중에 국고에서 환급받아 갚는 구조거든요. 그런데 만약 단일후보가 안 되면 그 돈을 갚을 길이 없어요. 또 단일화가 후보 등록 이전에 되라는 법이 없어요. 그러면 선거운동 첫날부터 유세차는 돌아다녀야 하고 전국 모든 가정에 배달할 공보물은 인쇄가 돼야 되거든요. 그 비용만 100억 단위가 됩니다. 정몽준이나 안철수가 끝까지 단일화 경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두 분은 100억 원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재력이 있기 때문이었어요." 윤석열에 대한 방어 논리가 촘촘하고 탄탄했다. 윤석열과 국민의힘이 결국에는 한배에 탈 수밖에 없고, 이해관계를 공유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것의 방증이었다. "윤석열 총장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전횡과 탄압에 맞서기 위한 것이잖아요. 이분이 그전부터 외교, 국방, 안보 같은 분야에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해도 웃기는 일이에요. 그렇다면 검찰총장으로 탄압을 받기 전부터 대권 출마를 준비했던 것 아니냐는 말을 듣지 않겠습니까." 윤석열이 처해 있는 입장, 그의 현재의 심경을 짚어내는 이 사람의 말은 들을 만했다. 직접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해준다면 윤석열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석열 총장은 자기 주변에서 조언해주는 사람들보다 본인이 정무적 판단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하거든요. 주변에 정치 잘 안다는 사람들 말 아무리 들어도 그대로 하면 대통령 될 거 같습니까. 제가 봤을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에 참여하기로 결심한 이후에는 여의도 바닥에 숱하게 흩어져 있는 전략가나 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넘어설 수 있다는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게 관건이라고 봅니다." 최재형에 대해서는 다소 유보적인 태도였다. 김황식의 예를 들면서 정치를 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 쉽지 않고 그런 결심을 한다 해도 성공하기는 더 어렵다고 했다. 이렇게 말할 때는 국민의힘 당 대표가 아니라 정치평론가처럼 보였다. "최재형 원장님은 김황식 총리와 경력이 비슷하시죠. 감사원장을 지낸 것, 미담이나 인품에 대한 평가도 그렇고. 김황식 총리님은 국무총리까지 성공적으로 수행하신 뒤에도 정치인으로 도전하는 과정에서는 약점을 노출하셨어요. 최재형 원장님이 정치에 참여하기로 하는 순간에 본인이 잃게 될 것들도 명확한데 혹시라도 시간에 쫓겨서 고민을 안 끝낸 상태로 오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3.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당 대표가 되고 싶습니다." 이 한 줄의 문장으로 변화가 시작되었다. 봄의 끝에서 여름의 초입까지 이준석 이름 석 자가 전국을 달궜다. 광주, 부산, 대구, 대전으로 이어진 합동연설회에서 한 후보에게 주어진 시간은 7분, 그 시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마법의 7분이라는 것을 이 사람은 보여주었다. 대구에서는 공존의 가치를 말하며 박근혜 탄핵의 정당성을 역설했고 부산에서는 미래 산업의 방향을, 대전에서는 '배려를 가장한 격리와 배제의 폐해'를 이야기하며 교육에 대한 비전을 설파했다. 경쟁자들을 비난하는 글은 단 한 자도 없었다. 네 곳의 연설 모두가 기억할 만하지만 광주 연설은 거듭거듭 곱씹어볼 만한 연설이다.
"최근 젊은 세대는 위선과 오만에 찬 새로운 민주주의의 방해자들과 맞서고 있습니다. 촛불로 거리를 메웠던 젊은 세대는 그들의 바람을 저버린 문재인 정부와 이제 최전선에서 맞서고 있습니다. (…) 저는 문재인 정부가 올곧은 민주주의의 길을 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항상 절대적인 가치로 놓아야 합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위기에 놓였을 때 눈을 감는다는 것은 절대적이어야 할 가치를 다른 것과 타협을 할 수 있는 무언가로 전락시킨다는 이야기입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진보 세력의 오랜 전유물이었다. 이 말만 나오면 보수주의자들은 기가 죽고 할 말을 잃었다. 군사독재 정권의 후예라는 사실, '광주'를 군홧발로 짓밟은 원죄 의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홍콩 민주화운동에 대한 현 정부의 태도를 문제 삼으며 문재인 정부가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절대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고 '훈계'하고 현 정권을 '민주주의의 방해자'라고 규정했다. '한국 민주주의의 심장' 광주에서 말이다. 기겁하고 경악할 이 발언에 왜 사람들이 제대로 주목하지 않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제1야당은 5·18을 폭동이라고 말하고, 5·18 유공자들을 세금 축내는 괴물 집단이라고 매도하던 사람들의 당이었고, 그런 망언을 한 자들을 당에서 쫓아내는 것을 망설이던 정당이었다. 이준석의 등장은 그랬던 정당과의 단호한 결별 선언인 동시에 민주주의와 인권을 말할 때 보수가 더 이상 진보에게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합동연설회 성적을 야구로 말하자면, 4타수 4안타였다. 부산이 안타, 대전이 2루타, 대구는 3루타, 광주 연설은 홈런이었다. 보수의 자신감을 역설한 대구 연설이 최대 히트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고, 자신이 정치를 하는 이유를 교육과 엮어 설명한 대전 연설을 으뜸으로 꼽는 이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4번의 타석에서 모두 드라마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초구에도 과감하게 방망이가 나갔고 볼카운트가 유리해도 볼이 좋으면 적극적으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노아웃 만루에서 강공을 구사했다. 남들이 볼 하나쯤 기다리자고 할 때 이 사람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더블플레이를 당할 경우 한순간에 경기 분위기가 뒤집힐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절벽에서 한 발 앞으로 나서는 담대함을 보여줬다. 관중석까지 포함해서 그라운드 전체를 시야에 두고 있는 노련한 감독이자 선수였다. 무엇보다 관중들이 무엇에 열광할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4. 이 사람에게 실패와 패배의 기억이 있을까. 전교생이 720명이던 중학교 졸업 성적이 2등이었다고 하니 1등을 하지 못한 게 실패일 수 있다. 서울과학고 성적이 40등 정도였다는 것, 하버드대학에서 자기보다 더 똑똑하고 영어를 잘하던 동료들에게 열패감을 느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대한민국 최고의 학벌을 스스로의 힘으로 갖췄다. 2011년 한나라당 비대위원으로 여의도에 발을 들여놓은 뒤 10년 동안 국회의원 선거에 3번 출마했고 대선 2번, 탈당, 분당, 합당을 두루 경험했으니 여의도 정치는 겪을 만큼 겪었다. 2016년에는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의 퇴진을 요구하며 열흘 넘게 단식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국회의원 배지를 달지 않고 10년을 여의도 정치권에서 살았다. 방송을 하든 당직을 맡든 뭐를 하든 국회의원이 아닌 사람은 여의도에서 제대로 사람 대접받기 어렵다. 그런 시절 10년을 보냈다. 하버드 교정만이 이 사람을 키운 것은 아니었다. 방송사 생방송 현장은 이 사람에게 일터이자 훈련장인 동시에 전장이기도 했다. 많을 때는 일주일에 20개가 넘는 방송 프로그램에 나간 적이 있었고 당 대표 출마 직전에도 16개 프로그램에 출연 중이었다. "종편 패널들은 분 단위 시청률 데이터를 달라고 해서 스스로를 연마합니다. 왜 그러냐면 채널이 돌아가지 않도록 말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정치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주목하도록 하는 능력과 대동소이한 능력이에요. 말을 할 때 군더더기 없이 계속 주의를 집중할 있는 화법을 구사하는 게 필요하거든요." 지난 5년 동안 종합소득세로 매년 2-3천만 원을 냈다. 방송 출연 수입이 1년에 1억 원이 넘는다는 뜻이다. 언제 어느 자리에 불러도 자기 몫을 할 사람이라는 게 방송가에서 이 사람에 대한 평가였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보수의 입장을 논리적이면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대표적인 보수 논객이었다. 이 사람에게 지난 10년은 좌절과 실패의 시간이었다. 자신을 정치권에 발탁했던 사람, 자신이 당선을 위해 애썼던 대통령은 가장 초라하고 욕된 모습으로 권좌에서 쫓겨났고 자신이 철학과 가치를 공유했던 정당은 권력을 진보 정당에 내줬다. 2016년 총선, 2018년 재보선, 2020년 총선 등 2년에 한 번씩 서울 노원병 국회의원 선거에 줄기차게 출마했고 그때마다 떨어졌다. 강북 지역에서는 높은 득표율이라고 하나 당선권에 이르기에는 모자라는 성적표였다. 지난해 총선에서 보수 정당 후보로는 역대 최고인 4만 6천 표가 넘는 표를 받고도 낙선했다. 방송 3사 출구조사에서 1위와 격차가 불과 2.7%포인트였으니 당선에 대한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컸을 것이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을 턴데 담담하게 낙선 소감을 페이스북에 남겼다. 이 글을 보고 이준석의 내공이 만만치 않다고 느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보수의 생각이 더 젊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 전통적 보수가 사용하던 좌파, 종북, 공산주의 같은 단어 없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경제와 안보를 넘어선 정의, 공정, 젠더 이슈 등 더 다양한 고민을 하는 모습, 앞으로 상계동에서만 아니라 어디서나 보수 정당이 그런 모습으로 바뀌어가도록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박근혜 탄핵을 둘러싼 의견 차이로 탈당과 분당이 끊이지 않았고 분열은 전국 단위 선거에서 보수 정당의 계속된 패배로 이어졌다. 이 사람 당적이 새누리당, 바른정당, 바른미래당, 새로운보수당, 미래통합당, 국민의힘으로 바뀐 것은 이 사람이 속한 정파의 행보가 그만큼 복잡했다는 의미다. 경쟁에서 별로 져본 적이 없고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사람이다. 그랬던 사람이 선거에서 연전연패했고 자기 편은 일패도지하는 상황이었다. 정치권 입문 초기의 신선함은 사라지고 말 잘하지만 약간 싸가지는 없는 청년 정치인의 이미지만 남은 채로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방송을 통해 인지도를 높이긴 했지만 축적의 시간은 아니었다. 방송에 능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진중권이나 유시민처럼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독보적인 위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방송을 할 때는 돈이야 많이 벌지만 정규적인 일은 아니니까요. 예능 방송을 나가면 단가는 높아도 하다 보면 자괴감이 드는 지점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뭘 지속적으로 쌓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니까요. 자기 회사를 하고, 학자로서 연구를 하면 쌓는다는 느낌이 드는데 방송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돈이 얼마가 모이느냐에 관계없이 내 능력이 얼마나 축적되고 있는지 체감이 안 돼서 고민을 많이 했죠." 유승민과 철학, 가치를 공유하면서 오랫동안 정치적 행보를 같이했고, 2011년 한나라당 비대위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김종인에게 정치적 스킬을 배웠다. 존경하는 사람도 김종인이라고 했다. 김종인은 다소 심술궂은 노(老)정객이라는 이미지를 주는 인물인데 이 사람은 한번 겪어보면 김종인의 진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정병국, 오신환, 하태경 같은 바른정당 동지들과 편하게 어울리고, 지난해부터는 국민의힘 김웅과 호형호제하며 지낸다.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을 보면 개혁보수, 합리적 보수라는 평판이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하다. 쉽지 않은 10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원칙을 버리지 않았고 허리를 굽히지 않았고 목표를 낮추지 않았다. 그 결과물이 과하다 싶게 자신감 넘치고 패기 있는 청년 정치인의 이미지였다.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신의 뜻을 펼 마당이 열리지 않는 여의도를 떠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이룩하지 못한 채 떠나면 정말 패배자가 되는 것이라는 자존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돌이켜 보니 그런 시간이 이 사람에게는 입에 썼지만 보약이었다. 자신이 상황을 주도적으로 만들어낼 능력은 없었지만 기회가 왔을 때 이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거머쥐었다. 10년의 단련이 없었다면 기회가 왔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5. 자기 입으로 자기 자랑을 하지 않는다. 듣는 사람이 이 사람의 공을 먼저 말하지 않고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 수 없게 만든다. 이럴 때는 대단히 영악한데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 이야기가 그런 예다. 산업기능요원으로 군 복무를 하던 시절, 어려운 처지의 학생들을 모아 수학과 과학을 가르치는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서울과학고 동문들을 중심으로 시작했지만 서울대, 카이스트, 하버드 출신들이 돈 안 받고 가르친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교사 수만 500명이 넘는 큰 단체로 발전했다. -어려운 형편에 있는 학생들을 돕겠다고 나섰는데 그전부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었습니까. "제가 그 활동을 선의에서 시작한 것은 아닌 거 같아요. 병역 의무기간에 영리 활동을 할 수는 없었고 단지 제가 잘하는 일로 여가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요." 자신의 일에 영향을 안 주면서 자신이 잘 할 수 있고 편하게 할 수 있는 일로 봉사활동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이 재미있었다. "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과외를 해본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서울과학고에 하버드 나왔다고 하면 과외 가격이 대한민국 탑이거든요. 시간당 100만 원, 200만 원씩 받는 친구들이 있어요." -왜 과외를 안 했습니까. "제가 돈 받고 사람들한테 지식을 가르치는 것을 싫어해요. 제가 직업적으로 선생을 하면 모르겠지만, 돈을 받으면 엄청나게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텐데, 제가 그런 사교육을 하면서 사회 개혁을 이야기하는 게 이상할 거 같아서 절대 안 했습니다." 국가 영재로 선정되어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장학증서를 받고 2억 원이 넘는 유학 비용을 지원받았다. 나라에서 받은 게 있으니 갚아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통해 돕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봉사단체의 비효율과 부정을 걷어내는 실험의 장으로 삼았다. "저희가 교사 숫자만 500명이 되는 규모까지 갔거든요. 이 정도면 사무국 직원을 10명은 둬야 해요. 10명이면 월급 아무리 적게 줘도 다 합쳐서 1년에 몇억 원씩은 줘야 되는 거예요. 사무국이 하는 일이 뭐냐면 봉사활동 확인서 떼주고 홍보물 만들고 시간표 짜는 거거든요. 저희는 그런 것들을 모두 자동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그러니 효율도 높고 부정도 발생할 여지가 전혀 없는 거죠. 박근혜 대표가 저희 단체 방문했을 때 제가 2시간 동안 설명한 게 그거예요. 그것을 보고 입이 떡 벌어진 거예요. 그래서 저를 영입한 거죠." 이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는 '교육'이다. 이 사람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분야 역시 '교육'이다. 교육 이야기를 할 때 주먹으로 책상을 두드려가면서 열을 올렸다. 이 사람의 끝이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사람의 시작은 '교육'이다. 교육에 대한 비전을 이야기한 대전 연설은 보수의 교육 철학을 알아듣기 쉽고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다.
"우리는 배려를 가장한 격리와 배제가 무섭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학생들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며 선심 쓰는 척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학교에서 뒤처진 학생이 다시 제 궤도에 복귀하기 힘든 것이 현재 저소득층 학생들이 겪는 교육의 현실이라면 우리는 그들이 다시 경쟁할 수 있도록 끌어올려 주어야 합니다." 2021. 6. 4. 대전 합동연설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생에게 일정 수준의 능력을 확보하도록 하는 책임교육제를 주장했다. 일정 수준의 실력에 이르지 못한 학생들에게는 야간 수업 같은 다소 강제적인 방식도 동